무조건 일정을 잡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얼마 전에 버킷리스트에 넣어둔 유일한 목록 때문이었다. 50대가 다 가기 전에 한라산 백록담을 열 번 이상 보는 것.
지난 3월 한라산 등반 때 하산 코스에서 지루함과 피로도를 극복하느라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뒤였지만 그래도 지금이 남은 날 중에 가장 젊은 시간이라는 것으로 정신 무장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 체력을 아끼고 싶은 마음과 달리 버스도 택시도 없는 곳을 예약한 탓으로 인도마저 없는 중산간 도로 옆을 9킬로 이상 걸어서 난대림산림연구소를 다녀왔다.
이른 시간에 애매한 저녁을 먹고 남원 바다 산책을 하면서도 체력이 바닥날까 조바심을 내며 발걸음 수를 줄이는 전략을 펼쳤다.
아침 4시반 기상. 눈이 절로 떠졌고 이후에는 잠이 다시 들지 않았다. 성판악으로 가려면 6시 40분에야 첫 버스가 올 텐데 마음과 달리 몸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간식과 도시락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환승까지 하고 성판악에 도착하니 7시 25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초창기 산행에는 마음이 너무도 조급해서 주변을 돌아보거나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동행인이 많을수록 주어진 시간이 촉박할수록 감상의 기회는 박탈당했고 오로지 긴장감 속에 오르내리는 일만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남편과 둘이서만 산행을 하게 되자 카메라도 챙기게 됐고 시간도 여유 있어 산행의 맛이 달라졌다. 이번 산행에는 카메라도 챙기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즐기고 오자는 생각이 가장 컸다. 나름의 한라산 즐기기에 새로운 도전장을 냈다.
탐방로는 다른 산행 때보다 한산했다. 오르면서 하산객을 가장 적게 마주쳤다. 치고 나가는 사람도 우리가 추월한 사람도 모든 것이 적은 제대로 즐길 기회를 주는 날이었다.
속밭대피소에서 달걀과 과일을 먹고 바람에 적은 옷을 조금 말리려 했으나 춥다는 생각이 들어 짧은 쉼을 하고 다시 올랐다.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30분. 자리를 펼쳤으나 점심을 먹기는 이른 시간이라 다시 간식을 이것저것 챙겨 먹었다.
먹을 것을 찾는 눈빛으로 사람들 주변에서 떠나지 않는 까마귀를 뒤로하고 정상을 향했다. 구름이 몰려왔다 걷히는 것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정상부가 숨었다 드러났다 요술을 부렸다.
고개를 박고 먹을 것을 챙기는데 사람들 탄성이 들렸다. 구름이 걷히고 서광이 비쳤다. 백록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람 대부분이 사진기를 들고 백록담 가장자리 나무 갑판으로 몰려왔다.
사진을 찍는 사이 구름이 몰려왔다. 다시 모습을 숨기는 백록담. 곧이어 햇빛이 구름을 몰아냈기에 천천히 점심도 먹고 여기저기 사진도 찍는 망중한을 누렸다.
간만에 백록담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자는 남편말에 동의하고 줄을 섰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나도 줄은 짧아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저체온 증상의 시초다싶어서 비옷을 챙겨 입었다. 히말야라 4000고지에서 느꼈던 그 고산증이 떠올라 걱정스런 맘에 손가락 끝을 열심히 주물렀다.
처음으로 정상에서 2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하산하면서도 비옷을 벗지 않았다. 십여 분을 더 내려오고서 더위를 느끼고 비옷을 벗었다.
처음이다. 성판악에서 다시 성판악으로 오르내리는 코스를 택한 것은. 덕분에 새로운 느낌을 얻었다.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해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긴 쉼을 하고서도 조급해지지 않았다.
느긋한 하산 걸음, 시간이 많이 길어지고 있었다. 다시는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었을 정도로 힘들었던 지난번 하산과 달리 지루하지 않았다.
오르내리면서 만난 사람들을 내나름의 해석을 통해 보는 것도 여유가 준 색다른 관찰법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버스가 왔고 서귀포 시내로 들어가 저녁을 먹고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이 가벼웠다. 상태가 좋지 않은 무릎을 아꼈더니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기는 해도 기분 탓인지 더 걸어도 될만했다.
이렇게 나의 7번째 한라산 정상 밟기는 추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매 번 백록담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이제 3번 남은 미션. 이른 시일 안에 또 도전하리라 마음먹어본다. <저작권자 ⓒ 컬쳐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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