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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최준렬 시인의 '손끝'

일상, 체험에서 길어올린 슬픈 서정의 비망록

김영주 기자 | 기사입력 2022/07/10 [21:28]

[새책] 최준렬 시인의 '손끝'

일상, 체험에서 길어올린 슬픈 서정의 비망록

김영주 기자 | 입력 : 2022/07/10 [21:28]

 

ㆍ신국판 ㆍ160쪽 ㆍ가격 10,000원 ㆍ2022.6.30. 발행

   

■ 책소개

 

일상, 체험에서 길어올린 슬픈 서정의 비망록

 

최준렬 시인은 일상에서의 소소한 체험을 작시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는 일상의 다양한 체험을 섬세하고 진지하게 관찰한다. 그는 일상 혹은 체험을 통하여 포착된 삶과 세계를 가공 없이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편한 독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와 친밀성을 확보한다.

 

그는 소소한 일상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시적 정수를 포착하는 데 능숙하다. 그가 포착하는 일상, 체험의 시적 정서는 희미하고 가녀린 슬픔이다. 그 슬픔은 인간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것이다. 예컨대 인간 본연의 순수 서정적인 슬픔이다.


최 시인은 산부인과 의사이다. 그는 의료현장에서 체험하는 다양한 사건을 서정적 필치로 즐겨 형상화한다. 그의 사유체계는 의학적 상상력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는 인생과 세계를 의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지한다. 예컨대 시인이 산부인과에서 경험하는 출산은 생의 희열과 숭고함이라는 생의 보편적 감각으로 승화된다. 그리하여 삶과 세계를 응시할 때에 산부인과의 의학적 경험은 본질에 다가가는 유효한 도구로 기능한다. 의료현장 체험을 소재로 한 시편들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 출산과정에서 겪는 고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중한 만남의 관계 등을 형상화한다. 이들 시편은 직접 체험의 묘사로 인하여 시상이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시의 메시지 역시 현장감을 확보하여 분명한 목적 지향을 보인다.


최준렬 시인은 일상의 타자를 관찰하는데 적극적이고 섬세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삶들을 구체적이고 따뜻하게 응시한다. 그 시선은 연민과 애정의 성향을 드러낸다. 관찰 대상이 되는 타자의 삶은 통근길에서, 직장에서, 산책길에서 만나는 조촐하고 소박한 풍경들이다.

 

시인은 그 풍경들에 슬픔의 정서를 투사한다. 시인의 이러한 자세는 일상에서 만나는 소시민의 삶을 조망함으로써 인생의 가치를 확립하려는 데 있다. 자아의 존재론적 고민과 인식론적 성찰과 더불어 타자의 삶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인해 시인의 타자를 응시하는 시선은 동정과 연민의 특징을 지닌다. - 양병호(시인,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책 속으로


버드나무 마른 정액이
건설로 떠다니는
4월의 한낮

 

짝을 찾아 비행하는 수컷 새,
푸드덕거리는 날갯죽지에서
추락하는 깃털

 

여자 없는 남자들의 배회

 

수정되지 못하고
길가에 하얗게 쌓여가는
춘정

  -「꽃가루」 전문
  

잎이 떠난 나뭇가지에
저녁노을이 내려앉네

 

조금 전
연인들의 마지막 포옹으로
가을은 가고
이별이 찾아오네

 

가을에 만난 사람들의
사랑은 짧네

 

노인이 오래 머물던
빈 벤치에
낙엽이 몸을 누이고

 

바람이 돌아간 자리
은빛 억새꽃
윤기를 잃고
흔들림을 멈추네
  -「가을 공원」 전문


마을 어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
햇빛과 그늘이 나란히 누워 있는 방

 

쿨럭거릴 때마다
선혈 한 바가지씩 뱉어내는
폐병 환자

 

기름기 번지르르 오른
비암 한 마리 뽀얗게 고아 먹으며
간신히 버텨내던 가을

 

지난해
사내의 아기가 태어났던 방

 

태반을 밀어내고
자궁이 쏟아낸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던 바닥

 

아기를 업고 토방에 서서
단풍나무 바라보며
붉은 눈물 흘리는
새댁
  -「무의촌·1」 전문


네 애미는/ 16살 산골 소녀// 학교에 다니지 않고/ 홀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난한 소녀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배가 아프다고/ 오빠가 데리고 왔다// 진찰실에 누운/ 소녀의 배는/커다란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불러 있었고// 서둘러 보호자를 내보내고/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임신 될 일이 없다고/ 한사코 부인하는 소녀의 말에/ 햇병아리 의사였던/ 나는/ 순간 오진이 아닐까 당황했었다// 진료의뢰서를 손에 쥐어주며/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세워/ 도시로 내보낼 때/ 소녀는 황급히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배가 너무 아프다고/ 보건지소 화장실로 급히 뛰어가고/ 순간 외마디 비명소리가 났다// 내가 달려갔을 때/ 너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탯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황급히 들어올린 너와/ 네 애미의 엉그적거리는 걸음걸이가/ 한없이 긴 복도였다// 서로 할 말이 없는/ 네 애미와 나는/ 탯줄을 자르면서/ 깊은 속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당직실을 박차고 나가/ 포수의 총에 맞은 산짐승처럼/ 눈밭에 선혈을 뚝 뚝 떨어뜨리며/ 네 애미는 도망치듯 달아났다// 수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26살의 나,/ 배가 고파 수시로 울어대는 너를/ 내 옆에 누이고 밤을 새웠다// 네 외삼촌은/ 다음날 아침에 찾아왔다// 네 애비는 같은 마을에 사는/ 가정이 있는 50대 남자// 아무런 사랑도 없이/ 어린 소녀의 몸에 네 씨앗을/ 아무렇게나 뿌려놓고/ 점점 불러오는 네 애미의 배를 바라보다/ 무서움에 떨며 야반도주하듯/ 멀리 이사를 갔다// 너의 젊은 외삼촌은/ 쌀 한 짝 값의 돈을 진료실 책상에 놓고 가면서/ 너를 부탁했다// 나는 청년의 호주머니에 억지로/ 그 돈을 집어넣어 주었다// 네 외삼촌이 보건지소 앞마당에/ 뿌려놓고 간 지폐는/ 빨간 핏자국과 같은 보폭으로/ 널려 있었다// 너를 포대기에 싸안고/ 대도시로 가던 눈 쌓인 정류장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너를 부둥켜안고 나는 울었다// 너는 3개월 후쯤/ 네가 나를 찾아 떠나왔던/ 벨기에로 보내진다고 했고// 몇 장의 서류에/ 내 이름과 날인을 하고 돌아서서/ 자식을 버린 심정으로/ 또 한 번 울었다// 나는 너를 아는데/ 네가 모르는 나를/ 중년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네 외삼촌이/ 나에게 맡기고 간 그 돈으로/ 오늘/ 너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산다// 나는 울어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너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울지 마라///
  -「무의촌·7」 전문

  ■ 차례


제1부
꽃가루/ 제주 동백/ 비밀/ Vaccine/ 사월초파일/ 봉안당/ 할망당/ 손끝ㆍ1/ 손끝ㆍ2/ 손끝ㆍ3/ 손끝ㆍ4/ 손끝ㆍ5/ 자목련/ 마음 마당/ 떠도는 섬

 

제2부
결혼의 강/ 하루살이 연애/ 무의촌ㆍ1/ 무의촌ㆍ2/ 무의촌ㆍ3/ 무의촌ㆍ4/ 무의촌ㆍ5/ 무의촌ㆍ6/ 무의촌ㆍ7/ 평화누리길/ 삼각형/ 와카남/ 재혼/ 어머니의 유언/ 꽃무릇

 

제3부
혼수품/ 아침기도/ 신호등 앞/ 가을 공원/ 운동장/ 당신/ 겨울나무/ 노동의 새벽/ 아침 식탁/ 새벽형 인간/ 순례단/ 갱년기/ 재회/ 누님의 밥상/ 아카시아 꿀/ 새해 아침

 

제4부
서귀포의 봄/ 누이의 생일/ 세월/ 티눈/ 능소화/ 추석/ 동지 이후/ 하늘 자전거/ 가을 저녁/ 이혼 법정/ 오류동 물류센터/ 해변의 밥상/ 회귀/ 해녀/ 마음의 온도/ 설날 아침


  ■ 시인의 말

 

▲ 최준렬 시인: 전북 부안 출생. 전북의대, 가천의대 대학원 졸업. 의학박사.    

팽창에서 소멸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응축의 삶을 살아간다고
나는 말한다

 

견고하고 미려한
옹이 같은 글을 쓰고 싶지만

 

매번
내 시는 푸석푸석하기만 하다

   2022년 5월
   최준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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