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산 눈 산행을 즐기다[종나미의 '도보여행'] 떠남은 언제나 옳다고는 하나 '지금은 정지중'
눈이 또 내렸다. 정확히는 여전히 날리고 있었다. 서둘렀다.
어제보다 높은 기온에 다 녹기 전 혹은 더 많은 눈이 내리기 전에 후딱 다녀와야 했다.
지난 수요일에 이어 눈 산행을 감행하는 마음은 쓸데없이 비장했다. 마치 중요한 임무를 받은 것처럼 스스로에게 떠밀려 집을 나섰다.
활자가 작은 탓에 읽기가 조금 벅찬 오소희의 아프리카 여행기인 <하쿠나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는 아직 앞부분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 않아도 쉽게 도전하기 힘들었을 남미 여행은 이제 코로나19로 언감생심이 되었고, 글로 만나는 남미대륙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떠남의 용기를 불러오고 눌러 놓은 여행 이유도 함께 데리고 왔다.
하지만 여행이라 읽지만 불가능이라 말하는 지금. 연말연시 제주도 가족여행조차도 취소했고 가까운 도시 여행조차도 못하는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산을 오르고 들판을 누비고 갯골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독후감을 대신하여 집을 나서기로 했다.
시시각각의 자연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여행자 모드가 되어보고자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텀블러에 커피를 준비하고, 추위에 대적할 자질구레한 보온 물품을 넉넉히 챙기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눈 산행이라 아이젠도 당연히 챙겼다. 스틱까지 들고 나서니 늘 준비는 히말라야 정도는 가야 할 판이다. 하지만 난 오늘도 소래산으로 향한다. 아이젠 없이 올라도 무방한 산행은 눈을 밟으며 오르는 맛을 선사했다. 부지런한 하산객 중에는 더러 아이젠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등산하는 아빠, 친구와 함께 온 중년의 여성들, 홀로 부지런히 치고 나서는 아저씨, 넓은 바윗돌에서 명상하듯 쉼을 하는 부부.
마스크를 하고 나서 산행 중에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가벼운 목례만 했던가, 고개를 돌리고 한쪽에 비켜 서 있었던가, 교행마다 찰나의 내적갈등이 생기지만 이제는 그냥 말없이 지나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익숙해졌다.
소래산 허리를 돌아 늘 오르는 길에 들어서니 오늘도 발자국이 없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오로지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며 오르는 맛은 색다르다. 지난 수요일에는 쌓인 눈 때문에 길이 사라져 잠깐 길을 헤맸다.
소위 등산객들이 코스가 아닌 곳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알바한다고 표현하는데 내가 소래산에서 짧은 알바를 한 것이다. 게다가 그날은 아이젠까지 했으니 바쁘게 녹는 눈이 등산화에 겹겹이 붙어, 무게로 나를 대적하여 붙잡으려 했다. 오늘은 가볍게 오르니 눈을 밟고 있다는 것을 빼면 평소 산행과 다를 바가 없다.
일명 소래마운틴 뷰 카페라 이름 지은 전망 포인트에 도달하자 서둘러 산행의 일미인 커피를 꺼내 든다. 전망이 좋은 곳인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눈발이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다독거림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따뜻한 손길도 부드러운 눈길도 받지 못한 애정 결핍 아이처럼 하늘은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트릴 것만 같다.
늘 하던 대로 풍경을 담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사색을 하며 행복감을 맛본다. 동행인이 있으면 있는 대로 혼자면 또 홀로 이 즐거움을 누린다.
이불을 걷어차고 소파의 안락함을 버리고 텔레비전의 유혹을 떨치고 나선 결단에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눈 쌓인 바윗돌을 조심스레 디뎌가며 정상에 오르니 다시 눈발이 날린다. 안개 속인 듯 흐린 가운데 아득한 시가지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셀카를 찍는 이, 풍경을 담는 이, 커피를 나눠 마시는 이들, 서로의 정상 인증 사진을 찍어 주는 이들. 정상에는 다른 날에 비해 비교적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곧이어 아이를 업은 젊은 엄마 등장. 담요로 푹 뒤집어씌워 달랑거리는 발을 보고서야 아이임을 알았다.
얼마나 산행이 간절했으면 올랐을까, 아니면 이 눈 쌓인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뭣이 됐든 난 짐조차 줄이고 싶은 산행이건만 아이까지 업고 오른 그녀의 용기와 열정에 맘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충분히 정상을 즐겼음에도 여전히 젊은 엄마의 등에서 벗겨지지 않는 담요를 쳐다보다 하산을 서둘렀다.
일단 아이젠을 하기로 했다. 올랐던 남쪽과 달리 하산 코스는 북에서 동으로 가는 길이라 얼음 위에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하산하는 사람보다 몇 배가 넘는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아이젠도 없이 씩씩하게 오르는 그들의 눈에 아이젠을 하고 무릎을 보호하고자 조심해서 내려가는 나의 모습은 산행 초보자로 보이기에 손색이 없다.
동쪽으로 온전히 넘어서자 흙길이 드러났다. 아이젠이 짐이 되는 순간이다. 결국은 벗어들고 만다.
운동화를 신고 오르는 젊은이, 노파심을 잠재우고 그의 운동 신경을 부러워하기로 했다. 스틱도 없이 오르는 초로의 부부를 만나니 염려가 스멀스멀 올라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오늘도 넉넉했던 커피타임 덕에 하산을 하고보니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높아진 기온에 눈 내린 풍경은 사라졌다.
오늘도 해냈다. 채제공을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정신이 몸을 지배하여 소래산행을 마쳤다.
채제공-조선 후기의 문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그는 67세에 2박3일로 관악산을 오르고 <遊冠岳山記>를 남겼다. 그는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다. 그 장수가 가는데 그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라며 노구를 이끌고 산을 올랐다. <저작권자 ⓒ 컬쳐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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